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거우차오 사건 (문단 편집) === 총성과 일본군 병사의 실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루거우차오 사건/Lugou_battle.jpg|width=100%]]}}}|| || 루거우차오 다리 위의 [[국민혁명군]] || 그러던 중 [[1937년]] [[7월 6일]],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지나주둔군 제1보병연대 3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 바로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900명을 잘 정비된 미군 진지로 몰아넣어 전멸시킨 그 [[과달카날 전투#s-3.1|이치키 지대의 이치키 대좌]].]가 500명의 일본군을 지휘하여 중국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루거우차오 동북쪽의 황무지의 중국 관할 구역을 침입하여 실탄 사격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에 중국군은 긴장하여 완핑현성에서 대책을 논하며 일본군이 중국군 기지 100미터 안에 진입할 시에 대응사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다행히도 7월 7일 밤까지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치키 소좌는 훈련을 끝내고 철수하기로 결정해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7일 밤 10시 40분, 용왕묘(龍王廟) 방면에서 수 발의 총성이, 제방 방면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리자 8중대장 시미즈 세쓰오(清水節郎, ? ~ ?) 대위는 즉각 병사들을 집결시켜 점호를 실시했다. 점호 결과 기병 척후병인 이등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미즈 대위는 이것을 중국군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이치키 소좌에게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7월 8일 0시에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 대좌에게 병사가 실종[* 실종되었다 추정하는 병사의 이름은 시무라 기쿠지로]되었다는 오보가 올라갔고 무타구치는 즉각 병력을 출동시키고 완핑현성에 주둔한 중국군과 교섭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7월 7일 심야, 29군 부군장 겸 베이핑 시장 [[친더춘]]에게도 일본군 병사 한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기찰정무위원회 외교위원회 주임위원 위종한, 전원인, 린겅위(林耕宇, 임경우)가 친더춘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지금 일본의 특무기관장 [[https://ja.wikipedia.org/wiki/松井太久郎|마쓰이 타쿠로]]가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가 중국군에게 사격을 받아 1명이 행방불명된 일의 조사를 위해 완핑현성에 들어와 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이 휴가를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베이핑 시장 친더춘이 쑹저위안을 대신하여 베이핑의 군정대권을 위임받은 상태였다. 쑹저위안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루거우차오는 중국 영토이며, 일본군은 우리 측의 동의도 없이 연습을 행하여 우리 중화민국의 주권을 침범하고 있다. 이는 국제법 위반이며 행방불명된 일본인 병사에 대한 우리 측의 책임은 없다. 더구나 일본군이 성 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단, 양국의 우호를 생각해 날이 밝으면 우리 측 군경에게 조사시키겠다고 회답하도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